[special] 낭만적 우수와 고전적 리얼리즘의 결합

2015-10-09

글 이지현

특별기획 프로그램 – 내가 사랑한 프랑스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_Marianne of My Youth_ST1

<나의 청춘 마리안느>

 
‘2015~2016 한-불 상호교류의 해’를 기념해 프랑스영화들로 채워진 특별기획 프로그램이 소개된다. 올해의 특별전은 책자로도 발간될 예정인데, 그 책의 저자들이 선정한 영화는 줄리엥 뒤비비에의 1954년작 <나의 청춘 마리안느>다. 이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9편의 목록은 프랑스 감독과 배우, 평론가와 영화제 관계자들이 채웠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도심 속의 방>(1982)을, 샤를 테송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집행위원장은 <여름의 조각들>(2008)을, 장프랑수아 로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프로그램 디렉터는 <벨아미>(2008)를 추천했다. 프랑스영화하면 떠오르는 낭만적 우수와 고전적 리얼리즘의 날카로운 결합이 이들 작품에서 발견된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소년 뱅상이 호숫가에 위치한 기숙학교로 전학 오면서 <나의 청춘 마리안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연히 호수 너머의 성에 사는 소녀를 발견한 뒤 뱅상은 첫사랑에 빠지고, 늙은 기사로부터 그녀를 구하겠단 상념으로 고성으로 향한다. 염세적이고 암울한 색채의 작품들을 선보였던 감독의 특기처럼, 이 작품 또한 개인적이고도 음울한 멜로드라마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비관적이며 운명적인 환상적 리얼리즘의 색채가 흑백의 스크린을 장악한다.

대학을 포기하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카메라와 함께 세계를 여행한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일화는 유명하다. 미국과 러시아, 부다페스트 등지에서 그는 단편을 촬영했고, 병역 기간에도 자발적으로 영화를 배웠다. 를르슈가 처음 <남과 여>(1966)의 줄거리를 생각한 것은 1965년 9월 도빌의 해변을 걷던 중이었다고 한다. 한 여인이 아이와 함께 해변에서 노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영화의 내용을 떠올렸다. 이 장면은 영화의 인트로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이밖에 실내 장면은 흑백의 화면, 실외는 컬러 화면으로 표현되며, 주로 대사보다는 비주얼을 통해 인물의 감정이 전달된다.

뮤지컬영화 <도심 속의 방>은 자크 드미의 작품들 중 가장 암울한 영화에 속한다. 감독은 <쉘부르의 우산>(1964)에서 보였던 특기처럼 일상적 대사들을 노래의 톤으로 바꾼다. 이 비현실적이고도 장중한 가극은 사회의 갈등을 담는다. 낭트의 조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 프랑수아는 약혼자를 두고서 귀족의 딸 에디트와 사랑에 빠진다. 에디트 역시 곧 결혼할 부르주아 청혼자가 있기에, 그들의 사랑은 환멸의 눈초리를 받는다.

데뷔작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에서 장 콕토와 고다르의 무성영화 레퍼런스를 통해 ‘누벨바그의 후계자’ 자리에 올랐던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는 2편이 초청된다. 그중 <나쁜 피>(1986)는 데이빗 보위의 노래 <모던 러브>에 맞춰 미친 듯 달리는 모습을 통해 1980년대 프랑스영화의 초상을 완성했단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핼리혜성의 접근으로 점점 더워지는 지구에 STBO라는 새로운 질병이 퍼진다. 알렉스는 백신을 구하는 임무로 조직에 잠입하고, 그곳에서 안나를 만난다. 감독의 본명을 딴 주인공 알렉스 역은 드니 라방이 맡았으며, 그는 이후에도 꾸준히 카락스의 페르소나로 등장했다.

홀리 모터스_Holy Motors_ST1

<홀리 모터스>

 
<홀리 모터스>(2012)의 주인공도 드니 라방이다. 그가 연기한 주인공 오스카 씨는 내러티브에 맞춰 외향과 연기 스타일을 다양하게 바꾸는 복수의 정체성을 지닌 인물로, 새벽부터 밤까지 고급 리무진 ‘홀리 모터스’에 올라타고 ‘광대와 거지, 가정적인 가장’ 등 무려 아홉 가지 역할로 변화한다. 앞선 영화에서처럼 <홀리 모터스>의 음악은 자동차를 달리게 하는 동력이 된다. 그리고 영화 속 자동차 동체는 ‘영화’ 매체의 다이내믹한 활동을 상징하는 거룩한 은유가 된다. 장 콕토와 브뉘엘, 조르주 프랑주 등 오마주의 장면들을 살피는 것도 즐겁다.

<나의 성생활: 나는 어떻게 싸웠는가>(1996)에서 아르노 데플레솅 감독은 기존 프랑스영화의 관습과 맞서는 작가적 재능을 선보인다. 감독의 설명처럼 이 영화의 목표는 “헤어진 커플들이 다시 만나 재결합하는 이야기를 담으며, 현재의 비평이 저평가하는 ‘전형적인 프랑스풍의’ 영화를 자신의 방식대로 그려내는” 데 있다. 대다수 국내의 관객들이 지닌 프랑스영화에 대한 관념인 ‘신랄한 자조의 지적인 역설’을 그대로 지닌 작품으로, 비교적 화면 전환이 느리고 커팅이 최소화되며, 대사의 양이 속사포처럼 많은 것이 특징이다.

배우로 더 유명한 벨기에 출신 뤼카 벨보 감독의 <그냥 웃자고>(1996)는 코미디 장르의 영화이다. 1996년 개봉 당시 이 작품은 평단과 대중의 고른 지지른 얻었으며, 이 영화를 통해 벨보는 감독으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아내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남자는 그 사태의 파악을 위해 일을 꾸민다. 세느강에 투신하여 자살하는 척 사건을 만든 것이다. 줄거리를 통해 짐작하듯 영화는 변형된 보드빌 장르에 속한다. 도덕적이거나 정신적 의도 없이, 마냥 우스운 상황을 이끄는 보드빌은 프랑스 스펙터클의 또 다른 전통이 된다.

할리우드식 블랙유머의 대척점에 놓인 ‘우호적 유머’의 거장인 클로드 샤브롤의 유작 <벨아미>도 이번 프로그램에 포함된다. 세련되고 유미적이며 세속적인 그의 서스펜스 조성은 이 작품에서 성실하게 드러난다. 매해 여름, 경찰서장인 벨아미는 아내의 가족들이 사는 남부 프랑스의 대저택에서 휴가를 보낸다. 하지만 살인혐의를 받는 남자가 나타나면서부터 그의 휴가는 뒤죽박죽이 된다. 부르주아 집안의 미스터리를 다루는 잔잔한 템포의 작품으로,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통제하는 섬세한 샤브롤식 연출이 돋보이는 프랑스식 미스터리의 수작이다.

흔히 “올리비에 아사야스에게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고들 말한다. 그 첫 번째 특성은 장만옥의 <이마 베프>(1996)를 통해 드러나듯, 익숙한 장르의 형식에서 예상치 못한 모더니티가 나타나는 식으로 표현된다. 즉, 장르의 변주다. 다음으로 아사야스는 은유적이지 않게 ‘정직하게’ 의견을 드러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 <여름의 조각들>이 그렇다. 평생 미술품과 고가구를 모아온 어머니가 죽으며 진행되는 영화의 줄거리처럼, 말 그대로 정직하게 “삶은 예술이며, 새로운 것은 위협적이고 쓸모없다”는 선인의 말을 <여름의 조각들>은 솔직하게 표현한다.

제목부터 시작해서, 아이러니가 장악한 영화 <예언자>(2008)는 프랑스영화계의 현재를 보여준다. 시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완성된 ‘서정적 비현실성’의 정서가 작품 전반에 배어 있다. 한때 ‘제2의 마티유 카소비츠’라 불리던 자크 오디아르는 이 영화를 통해 프랑스영화계의 구원투수로 떠올랐다. 주인공은 6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게 된 19세의 말리크로, 그는 감옥 내에서 어둠의 세계를 장악하는 법을 터득한다. 영화는 그 과정을 선과 악의 구분을 중단한 채, 구원과 절망을 뒤섞는 탄복할만한 능력으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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