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 choice] 망각의 시 Oblivion Verses

2017-10-16

글 곽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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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레자 하타미 |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칠레 | 2017년 | 92분 | 플래시 포워드
OCT 16 M2 16:30
OCT 19 CS 10:00
OCT 20 L5 20:30

시체보관소를 관리하는 노인이 있다. 평생 죽은 자의 뒤를 정리한 그는 어느새 자신의 이름마저 잊었다. 이제는 안치된 시신도 없는 외진 자리의 시체보관소에서 노인은 뜰에 있는 꽃에 물을 주고, 죽은 자의 기록을 관리하며, 무덤을 손보는 일을 수행처럼 해나간다. 그런 그에게 더이상 여기서 일할 수 없다는 명령이 떨어진다. 정부의 민병대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민간인의 시신을 숨기려하기 때문이다. 민병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신원미상의 젊은 여성이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의 모습에서 개인적인 상실의 경험을 떠올린 노인은 이름 모를 시신을 위해 합당한 장례를 치러주려 한다.

영화는 젊은이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노인의 여정을 가만히 따른다. 방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자신이 평생 해온 절차와 방식을 고수한다. 시신을 누일 땅을 알아보고, 부고 소식을 알리며, 장례식을 치른다. 이런 노인을 무덤 파는 남자와 운구차 운전사, 실종된 딸의 시신을 찾아 시체보관소를 찾았던 여인이 돕는다. 조용하지만 고집스러운 이들의 행보는 어떤 면에서 투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상대는 권위적인 정부이면서, 동시에 망각이라는 인간의 필연적 본능이다. 노인의 손을 거친 망자들의 기록은 서가를 가득 채우고, 무덤을 파는 사내는 자신이 판 무덤의 수와 묻힌 이들의 생애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어떤 이도 쉽게 잊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는 이처럼 죽음 앞에서 고집스럽게 삶을 상기하는 이들을 통해, 사람은 잊혀질 때 비로소 죽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드러낸다.

영화에 인물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배경 역시 남미의 어느 지역으로 뭉뚱그려지고, 도심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정부 시위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인물의 대화에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전부다. 정보의 빈틈을 채우는 것은 인물이 처한 상황을 은유하는 상징적인 이미지들이다. 동료를 잃은 뒤 자살한 범고래의 이미지는 상실감의 부피를 증명하고, 구도자의 손을 닮은 거대한 조형 앞에 선 노인의 이미지는 운명을 마주한 인간의 모습을 함축한다. 시적 호흡과 긴장을 간직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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